전투는 1950년 9월 15일에 시작되어 9월 19일에 끝났다. 유엔과 한국군이 필사적으로 방어하던 부산 경계에서 멀리 떨어진 기습적인 수륙양용 공격을 통해, 유엔군의 폭격으로 무방비한 인천시를 확보했다. 전투는 조선인민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상대로 연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유엔이 서울을 탈환하면서 한국의 공급라인이 부분적으로 단절됐다. 8월 23일, 사령관들은 도쿄맥아더 본부에서 회의를 가졌다. [42] 조지프 로튼 콜린스 미 육군 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 해군 작전 사령관, 미 공군(USAF) 작전 부사령관 이드왈 에이치 에드워드 중령이 모두 워싱턴 D.C.에서 일본으로 날아갔다. 브리핑의 일부; 호이트 반덴버그 미 공군 참모총장은 „해군과 해병대에 본질적으로 속한 작전을 합법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참석하지 않았다. 인천 상륙을 주도할 책임이 있는 해병대 참모진은 초청받지 않아 논란이 됐다. 브리핑에서 제임스 H.
도일 미 해군 제독 9명은 상륙의 모든 기술적, 군사적 측면에 대해 거의 90분 동안 연설했다. [45] 맥아더는 군산에 상륙하면 8군과 비교적 쉽게 연계될 수 있지만 „포위되지 않는 포위작전이 될 것”이라며 부산 경계의 취약한 주머니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는 미 해군에 대한 애정을 말하고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이 코레지도르를 어떻게 안전하게 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셔먼을 이겼다. 셔먼은 도일의 분노를 떠나 인천 작전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46] 전투 중 수륙양용 병력을 상륙하고 지원한 함선의 플로틸라 부대는 수륙양용 전쟁 전문가인 아서 D. 스트루블 제독이 지휘했다. 스트루블은 노르망디 상륙과 레이테 전투를 포함하여 차 세계 대전에서 수륙 양용 작전에 참여했다. [60] 그는 1950년 9월 12일, 기함인 USS 로체스터 호에서 인천으로 향했다.
그의 함선 중에는 로체스터, 중순양함 USS Toledo, 영국 경순양함 HMS 자메이카, HMS 케냐로 구성된 총격 지원 그룹, USS 콜렛, USS 드 헤이븐, USS 구르케, USS 헨더슨으로 구성된 태스크 엘리먼트 90.62의 미국 구축함 6대가 있었다. , USS 리먼 K. 스웬슨, USS 맨스필드. [61] 로얄 캐나다 해군 구축함 HMCS 카유가, HMCS 애써배스칸과 HMCS 수도 침공 태스크 포스에 참여했다. 경북도는 요원들이 인천 인근 섬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6개의 쓰레기로 용흥도를 습격하는 등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다. 클라크는 삼판에 기관총을 장착하고 공격 쓰레기를 침몰시켰다. [57]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클락을 도운 혐의로 민간인 50명을 살해했다. [58]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가운데)이 1950년 15월 15일 인천 상륙 당시 USS 마운트 맥킨리 선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맥아더는 브리핑 후 45분 동안 인천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47] 그는 북한이 너무 무겁게 방어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공격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고, 인천에서의 승리는 잔인한 겨울 캠페인을 피할 것이며, 북부 의 강점을 침범함으로써 유엔군이 KPA 의 공급라인을 차단하고 통신.
[48] 셔먼과 콜린스는 워싱턴 D.C.로 돌아와 루이스 A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다.